미공개 외전 미리보기

최무원 외전 미리보기

소장본에 들어가는 외전입니다.



무원은 31살 평생을 바쁘게 살아왔다. 교수를 하기 직전까지 국내외를 오가며 학업에 열중했고, 얼마 전에는 타인보다 뛰어난 두뇌와 멀끔한 외모 그리고 우수한 집안을 뒷배경으로 두고 SSCA 최우수 논문상까지 수상했다. 마찬가지로 위와 같은 이유로 교수 자리도 어렵지 않게 무원에게 떨어졌다.

인생은 복잡하면서도 동시에 단순했다. 배우고 일하는 과정은 복잡했지만, 그것을 반복하는 그의 생활 패턴은 지극히 단조로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오는 여자는 막고, 가는 여자는 막지 않는 지극히 경직되고 무신경한 인간이었다. 사실 여지를 주지 않는 그에게 여자가 생긴다는 건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으나, 아무리 잘 막아도 어떻게든 비집고 틈 사이로 들어오는 여자들이 있기는 했다. 억지로 끌어당기고 쫓아낼 성격은 아니었으므로 무원은 그의 인생에 비집고 들어왔던 몇몇 여자들을 방치 했다. 그녀들은 이런 최무원 같은 남자들의 특징을 잘 아는 수가 높은 자들이었기에 대부분은 신경에 거슬리지 않게 선을 잘 지키고는 했다.

하지만 돌 같은 남자를 오래 만나다 보면 제아무리 날고 기는 여자라 해도 타격을 받기 마련. 그래서 그녀들은 결국 지쳐 스스로 떨어져 나갔다. 앞서 말했다시피 무원은 오는 여자는 막고 가는 여자는 막지 않는 인간이었으므로 이별은 단조로웠다. 그의 인생처럼.

그런 그가 최근에 몰입하고 있는 게 한 가지 생겼는데, 생애 최초 남자친구 되시겠다. 사회학 교수로서 사회에 만연한 제도, 고정관념, 차별 등에 대해 다루고 강의하지만 그런 최무원 교수에게도 어디선가 똑 떨어진 10살 연하의 남자친구는 그리 쉬운 문제가 아니다.

무원이 복도를 걸을 때마다 지나가던 학생들이 시선을 피했다. 아예 고개를 숙이거나 돌려 버리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 하지만 그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으므로 계속 걸었다. 지난밤 학회 세미나가 있었고, 그곳에서 부득이하게 하루를 지냈어야 했으므로 오늘은 할 일이 많았다. 밀린 학과 일도 처리해야 했고, 세미나에 다녀온 보고서도 작성해야 했다. 오후에 강의도 앞둔 상태다.

무원은 이런 의무적인 학교 일이 번거로웠다. 귀찮고 시간이 아까웠지만 교수라는 명예와 권위로 열람하고 얻을 수 있는 사회학 자료나 통계가 많아서 인내할 가치는 있었다.

열쇠로 연구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답답한 공기가 훅 끼쳤다. 환기가 필요한 것 같다. 무원이 들고 있던 서류를 책상 위에 내려놓고 창문으로 몸을 틀었다. 그러다 이내 내려놓은 서류 각도가 틀어졌다는 걸 깨닫고 마저 정돈했다. 무원은 곧 연구실 문고리와 책상, 책장, 창문 등에 소독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교수님!”

창문 손잡이에 손을 올렸을 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대로 손잡이를 놓고 뒤 돌자, 무원의 남자친구가 서 있었다. 짓궂게 웃는 얼굴이 제법 개구지다.

“언제 왔어요?”

유하는 조교에게서 받은 연구실 열쇠를 흔들어 보이며 키득거렸다.

“가져갈 거 있다고 핑계 대서 왔죠.”

“조교가 주던가요?”

“저 엄청 빌었어요. 교수님 리포트에 실수한 거 있는데 최 교수님 돌아오기 전에 아주 잠깐만 연구실 가서 수정만 하고 나오겠다고. 히히.”

학생들은 무원과 유하의 사이가 나쁘다고 알고 있다. 이번 학기 초에 있었던 오해 때문이었다. 유하에게는 무원이 지도 교수도 아닐뿐더러 한 학기나 길어봐야 두 학기 듣고 안 볼 교양 교수여서 학생들이 심각하다 판단하지 않기도 했고, 또 지금은 그럭저럭 나쁘지 않게 지내는 걸로 안다. 엄밀히 따지자면 가깝게 지내는 걸 넘어서 윤리적 가책이 느껴지는 사이까지 발전했지만, 무원은 오해를 굳이 바로잡을 마음이 없었다. 유하도 무원과 나쁜 사이라고 알려진 게 더 편한 듯했다.

유하는 헤헤 웃으며 무원이 벗은 코트를 덥석 받아들었다. 그리고 옷걸이에 손수 걸었다. 각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일단 넘어가기로 한다.

칭찬을 들을 줄 알았는데 아무런 말도 들려오지 않자 불안했는지 유하가 눈썹이 축 처진 채로 무원을 올려다보았다.

“보고 싶었는데…….”

“…….”

무원의 어린 남자친구는 무뚝뚝하게 대하면 당황하여 이런저런 말을 꺼내다 이내 제자리에서 두어 바퀴 돌며 고민한다. 그 시무룩한 모습이 귀여워 더 무뚝뚝하게 대할 때도 있었다. 살짝 악취미라는 건 무원 그 자신도 인정하는 바이다. 하지만 아예 그만두는 건 어려웠다. 유하는 울상이 되면 정말 유_유 와 같은 표정이 됐는데, 그걸 종종 보는 게 무원의 낙이었다. 아무에게도 말한 적 없지만.

“교수님 세미나 간 사이에 제니랑 찰스가 밤에 엄청 기다렸는데.”

유하가 큰 눈을 깜박이며 눈치를 보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중략)



얼마 안 가 견디지 못하고 먼저 매달려오는 애인을 보고 무원은 갈등했다. 당장 써야 할 보고서가 있다. 찾아봐야 할 자료도 있었고, 그다음에는 무려 수업에 들어가야 한다. 그는 이런 종류의 갈등에 익숙지 않았다. 늘 일이 먼저였고, 연애나 약속은 부수적인 것이었다. 그는 약속을 미루거나 연인을 소홀히 대하고 밀치는 것에 죄책감 없이 살아왔다. 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학업과 일이었으니까.

지금껏 살아온 신념에 의거하자면 당연히 유하를 밀쳐야 했다. 무원은 이유도 논리정연하게 나열할 수 있었다. 첫째로 보고서는 오후까지 작성해야 제출에 차질이 없었고, 두 번째로 수업 준비를 해야 했다. 세 번째로 이곳은 연구실이고, 연구실에서는 일에 관련된 업무를 하는 게 정상이다. 연애를 하는 곳이 아니라. 네 번째, 소리가 들릴 수도 있다. 유하는 관계 시 소리가 큰 편이었다. 목 놓아 우는 듯한 신음에 흥분이 고조되는 건 맞지만, 역시 이곳에서 그랬다가는 바깥까지 들릴 게 분명했다. 무원은 애인을 믿을 수 없었다. 과연 어린 애인이 신음을 참을 수 있을 것인가. 그는 불신한다. 마지막으로, 조유하는 무원의 애인 이전에 학생이었다.

당장 유하를 뒤로 미뤄야 하는 이유는 차고 넘쳤다. 하지만 왜 최무원 자신은 오히려 어린 애인을 당기고 있는가? 31살 인생, 엄청난 고민에 당도했다. 이 자리에서 애인을 안아도 되는가? 어째서 자신은 스스로를 통제하지 못하고 있는가. 이는 과연 정상적인 현상인가.

“으응.”

애인을 만질 합리화를 위해 근거를 꼽아보지만,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좋은 사교육에 유학, SSCA 최우수 논문상까지 마친 그의 비상한 머리로도 변변한 변명거리를 만들어낼 수 없었다.

대신 이미 축축하게 젖어가는 애인의 눈가와 입술만이 눈에 들어왔다. 아니다. 저런 것을 근거로 삼을 수는 없다. 이성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주인님…….”

어느새 유하가 책사 위에 눕혀지며 무원을 불렀다. 그는 흐트러진 책상 위의 물건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걸 모두 상쇄할 수 있는,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이 책상 위에 올려졌으므로 그런 난장 따위는 인내할 수 있었다.

마지막 발악인 셈으로 무원은 교수가 지녀야 할 책임감과 윤리의식을 지켜보기 위해 시선을 돌렸다. 옮긴 시선에서 책장 맨 위 유리장 안에 고이 보관해놓은 유하 인형과 눈이 마주쳤다. 언젠가 무원과 그의 어린 애인이 마트에 갔을 때 샀던 유하를 닮은 인형이었다. 학생들은 대개 무원의 연구실에 들어오면 눈을 내리깔고 달달 떨다가 가는 게 태반이라 아직 아무도 저 인형의 존재를 모르지만, 무원은 간혹 일을 하다가 고개를 들어 저 인형을 물끄러미 보고는 했다.

“…….”

“주인니임?”





(중략)



불과 몇십 분 전 연구실에서 학생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고 나왔는데, 공교롭게도 오늘은 애인의 발표날이었다. 발표자 명단을 확인한 무원은 급격히 후회했다. 일어서서 몇 분 동안 설명을 해야 할 텐데 자신이 걷기도, 일어서기도 힘들게 만들어버린 것이다. 그는 이런 종류의 후회에 매우 취약했다. 그간 겪어본 적이 없어서.

“3조 발표자 나와주십시오.”


유하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걸어 나왔다. 유하는 대중 앞에 서서 이야기를 하는 데에 두려움이 없었다. 그래서 다른 발표자와 달리 실수하는 것이 없다. 목소리 톤도 일정하고, 전달력도 나쁘지 않았다. 그리고 유하가 PPT와 리포트에서 조사해 온 부분은 괜찮았으나, 함께 한 조원들이 문제였다. 개인 발표로 했으면 더 성적이 좋았을 텐데, 조별 과제인지라 리포트를 하나로 합쳐놓고 보니 결과물이 무원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는 무심한 얼굴로 발표 내용을 경청했다. 귀로는 유하의 발표를 듣고, 눈으로는 앞에 앉은 학생들 반응을 보았다. 유하가 말을 하다가 잠시 앗, 하는 추임새를 넣으며 목을 가다듬었다. 좀 전 연구실에서의 여파로 목께가 붉게 달아오르고, 목이 살짝 쉬어버린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고 지금 유하의 목소리가 나쁜 건 아니었다. 쉬어버린 목소리든, 아니든 유하의 목소리는 언제나 듣기 좋았다.

하지만 같은 조원이라는 학생들은 책상에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할 뿐 반응이 없었다.

저렇게 귀여운 추임새를 넣었는데 조원이자 동기로서 아무런 반응이 없다니. 무원은 그들을 노려보며 유하의 친구로서 그들이 C- 정도 된다고 판단했다. 가장 친한 것 같던 경영학과 2학년 과대도 그랬다. 유하의 발표가 끝났는데 그에게 박수조차 보내지 않다니. 최고의 발표는 아니었어도, 확실히 평균 이상이었다. 침묵하는 현구를 두고 무원이 유하의 친구로서 점수 D라 확정 지었다. 제일 친한 친구라더니, 괘씸하기 짝이 없다.

잠시 현구와 눈이 마주쳤지만, 자신을 노려보는 교수님 때문에 흠칫 놀라서 자세를 고쳐 앉은 현구와 달리 무원은 태연하게 시선을 갈무리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양.

“교수님?”

발표를 마친 유하가 긴장한 듯 무원을 바라보았다. 그 소리에 흘깃 유하를 한 번 보고서 무원은 웃지도, 찡그리지도 않은 얼굴로 묵묵히 점수를 매겼다.


(중략)